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메르 제국 (문단 편집) == 사회 == 크메르 제국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적인 계급 사회였다. 사회 피라미드의 최정점에는 신왕(神王) 데바 라자가 있었고, 그 아래에 사제 계급인 [[브라만]],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평민 계급인 [[바이샤]], 노예 계급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배층보다는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0세기 경의 크메르 제국에는 왕을 포함한 최고 지배 계급이 기껏해야 4,000여 명을 넘지 않았다. 이들은 제국의 부를 틀어쥔 채로 많으면 1,000명이 넘는 노예를 부릴 정도로 부유했다. ] 캄보디아 자체가 전통적으로 농업 사회였다보니 농민들의 수가 조금 더 많았지만, 바로 곁에 어획량이 풍부한 톤레삽 호수가 위치한 덕에 어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크메르 제국의 왕들은 살아있는 [[신]]이자 하늘과 인간의 중재자로 여겨졌다. [[힌두교]]의 경우 [[시바]]의 대리인으로, [[불교]]의 경우 [[전륜성왕]]이자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왕은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다스릴 책임이 있었고 이를 근거로 거대한 저수지를 짓거나 스스로의 위엄을 드높인다는 명분으로 장대한 사원을 짓곤 했다. 백성을 보살핀다는 [[유교]]적 개념보다는 왕이 백성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정]]의 모습이 훨씬 강했던 국가였다. 하지만 이건 크메르 제국이 잘나갈 때 얘기였고, 훗날 제국이 쇠퇴하면서 왕의 권위가 심각하게 약화되자 사원이고 저수지고 제대로 보수하지도 못하는 일이 왕왕 벌어졌다. 당연히 백성들의 원망의 화살은 왕실에게 날아갔고 이는 크메르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된다. 캄보디아 여성들은 당대 기준으로 꽤나 사회에 왕성하게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크메르 제국을 방문했던 주달관의 기록을 보면, >'무역 업무를 볼 줄 아는 자들은 죄다 여자들 뿐이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일을 잘하는 여자를 섭외해야만 한다.' >'여자들이 어찌나 일을 많이 하던지 20살의 크메르 여인이 40대, 50대의 중국 여인보다도 더 늙어보인다.' 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앙코르 시장판은 대부분 여성들의 손으로 돌아갔으며, 유교 사상 때문에 [[내외]]의 개념이 있었던 중국과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이 시대의 크메르는 훨씬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자유로웠다. 다만 성적으로 평등했다는 이야기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크메르 여성들은 지나치게 빨리 결혼해야하는 [[조혼]] 풍습에 시달렸는데, 이는 국가적으로 보면 인구 증가에 기여했지만 여성 개개인의 삶 측면에서 봤을 때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파일:angkor_w.logo_.jpg]] 13세기 [[원나라]]의 주달관이 보았을 앙코르 시내의 풍경. 크메르인들의 주식은 당연히 [[쌀]]이었다. 저수지 근처의 거대한 평야에서 집단으로 벼와 쌀을 경작했고 [[코코넛]], [[사탕수수]], [[야채]], [[과일]] 등 다양한 작물들을 함께 길러 먹었다. 바로 인근의 거대한 톤레삽 호수에서는 막대한 양의 물고기들이 잡혔기에 어업에 종사하는 인원도 상당했다. 크메르인들은 톤레삽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바로 구워 먹거나 [[어묵]] 형태, 혹은 말려 먹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닭]], [[돼지]], [[소]] 따위의 짐승들도 함께 길렀는데, 여유가 되는 짐승들은 시장통에 내다 팔기도 했다. 참고로 앙코르 시장에는 고정 건물이나 좌판대가 딱히 없었다. 그냥 땅바닥에 되는대로 주저앉아 파라솔 하나 피고 좌판을 깔면 그게 곧 시장이 되었다. 가끔씩 관리들이 돌아다니며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긴 했지만 딱히 시장 구획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고정된 건물들을 따로 세우지도 않았다. 참고로 톤레삽 호수는 크메르 제국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호수였다. 300여 종이 넘는 어종들이 득시글거리는 호수인데, 우기가 되어 물이 가득차면 여기 들어있는 물고기들이 미친 속도로 번식을 한다.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오면 낚시는 더더욱 쉬워졌다. 톤레삽 호수의 수면은 굉장히 빠르게 내려간다. 워낙 수면이 빠르게 하강해서 물고기들이 땅 위에 갇힌 채 펄떡거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우기에 잔뜩 번식해서 불어났던 물고기들이 좁아터진 호수에 갇혀버리니 정말 '''세계에서 가장 물고기를 낚기 쉬운 호수'''라고 불릴만한 장소였다. [[대나무]]로 엮은 덫과 그물을 치기만 하면 물고기들이 떼거지로 걸려들으니 식량 걱정은 없었다. 게다가 톤레삽 호수는 우기에 범람할 때마다 막대한 양의 토사물을 쓸고 내려왔는데, 이때 쌓인 토사물들은 천연 [[비료]] 역할을 해주기까지 했다. 농부들은 톤레삽 호수 근처에 매년 자연적으로 형성된 비옥한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축복받은 환경이라 할 만했다. 왕족과 귀족들은 돌로 쌓은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살았지만 평민들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왕자와 귀족들의 저택은 평민들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지배층의 저택 지붕에는 기와들이 덮여 있지만, 평민들의 저택은 죄다 초가로 이어 단 하나의 기와도 찾아볼 수 없다. 평민들의 집은 재력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아무리 부유한 평민이라도 차마 지배층의 것에 필적할 만큼의 집은 감히 짓지 못한다.' 라고 나와 있다. 앞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평민들의 집은 [[대나무]] 등 짓기 쉬운 목재로 짓고, 바닥에는 돗자리를 깔았으며 위에는 초가로 지붕을 올렸다. 일반적인 평수는 7평에서 20평 정도였다. 평민들의 집은 보통 부모의 안방, 미혼한 딸들의 방,[* 아들은 결혼을 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어디에서 자든 상관이 없었다. 허나 미혼 처녀의 경우, 순결의 의무 때문에 독자적인 방을 할당받았다.] 손님을 맞는 거실 이렇게 3개로 이루어졌다. 밥은 조금 떨어진 [[주방]]에서 지었고, 화장실은 집 멀리에 큰 구덩이를 파서 변을 보고 바로 흙을 덮어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반쯤은 살아있는 신으로 취급받은 왕은 극도의 사치를 누렸다. 아래는 [[원나라]]의 사신이던 주달관이 당시 크메르 국왕이었던 인드라바르만 3세의 왕실 행렬을 직관하고 남긴 기록이다. 당대 크메르 제국의 왕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잘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 왕이 나갈 때 군대가 그 앞에서 호위를 선다. 군대가 다 나오면 깃발, 깃대를 든 인원과 악사들이 그 뒤를 따르며, 300명에서 500명 정도의 궁녀들이 꽃무늬 옷을 입은 채 머리에 꽃을 꽂고, 손에 양초를 든 채로 극단을 이룬다. 왕이 행차할 때는 대낮에도 환하게 촛불로 불을 밝힌다. 그 다음 또다른 궁녀들이 손에 황금과 은으로 만든 식기와 기물들을 들고 줄을 이룬다... > >궁녀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왕의 개인 친위병들과 함께 행진한다. 염소와 말이 끄는 수레는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 신하와 왕자들은 코끼리를 타고 있고, 그 앞에는 수없이 많은 붉은 우산들이 늘어뜨려졌다. 그 뒤에 왕의 아내와 후궁들이 가마와 코끼리, 수레와 말을 타고 앞선다. 100여 개가 넘는 금으로 장식된 우산들이 그들을 따른다. 그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야 손에 신성한 검을 쥔 채로 코끼리 위에 서있는 국왕이 등장한다. 국왕이 탄 코끼리의 엄니는 금박으로 얇게 감쌌다. > >오직 국왕만이 꽃무늬로 온통 화려하게 장식된 천으로 옷을 지어입을 수 있다. 목에는 약 3파운드의 큼직한 [[진주]]를 달고 있으며, 손목, 발목, 목에는 고양이 눈이 박힌 금팔찌와 반지를 차고 있다. 외출할 시에는 손에 순금을 녹여만든 검을 들고 다닌다... [[파일:A+view+along+a+thoroughfare+in+the+urban+core+of+Angkor+.jpg]] [[앙코르]] 시내 한복판의 일상적인 좌판 풍경. 석재 건물은 사원이나 일부 유력 집안의 대저택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다. 크메르의 핵심 종교는 [[힌두교]]였다. 훗날 [[불교]]가 [[스리랑카]] 및 [[인도]]에서 유입되어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사회의 기본 틀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다만 힌두교 자체가 계급적인 성향이 강하다보니, 사제인 [[브라만]]이 집전하는 힌두 의식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 같은 사회 지배층만이 참여가 가능했고, 일반 평민들은 참석이 어려웠다. 이후 13세기에 들어 만인의 평등을 중시하는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유입되며 널리 퍼지자 하층민들은 믿기 쉬운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게 된다. 결국 국왕 [[자야바르만 7세]]가 아예 불교로 개종하고 난 이후부터는 힌두교보다도 불교의 영향력이 훨씬 커졌다. 크메르 제국의 병사들은 딱히 갑옷이나 무구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달관의 기록에 따르면 크메르 군대는 [[창]]과 [[방패]] 같은 정말 기본적인 무기로만 무장했을 뿐, 통일된 갑옷이나 병갑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수코타이 왕국]]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아무 것도 주지 않은채 맨손으로 나가 싸우라고 떠밀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투석기]], 갑옷, [[투구]] 같은 것들도 없었다. 그냥 천으로 만든 바지에 두건 하나 두르고 나와서 싸웠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고관이나 왕 같은 지휘관들은 금속으로 만든 그럴듯한 갑옷을 걸쳤지만 이는 철저히 의례용이었을 뿐, 실제로 전쟁에서 실용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톤레삽 호수에서 치러진 일부 [[해전]]에서는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마저도 해전을 제외하면 잘 등장하지 않는 걸 보아 활과 화살도 잘 사용하지 않고 오직 [[육탄전]]으로만 승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에 쌍궁을 장착해 사용하는 부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크메르 제국의 정규 병종이라기보다는 크메르에 고용된 [[참족]] 용병들이 자기들끼리만 썼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크메르인들도 사람이었던지라 당연히 외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덥고 습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기후 탓에 옷을 칭칭 두르고 다니지는 못했다. 평민들은 '삼폿'이라 불리는 옷을 입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천을 허리춤에 빙빙 두른 다음 사타구니 사이로 꺼내 허리띠로 고정하는 형식의 옷이었다. 여성은 가슴을 가리기 위해 상체에도 천을 걸쳤다. 남녀를 불문하고 단순한 형태의 천을 이마나 팔뚝에 두르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옷가지들을 통틀어 '크라마'라고 부른다. 여유가 많은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비단]] 같은 값비싼 작물로 만든 옷을 입거나 [[황금]], [[보석]]으로 만든 악세사리들을 주렁주렁 걸쳤다. 특히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던 상류층들은 중국에서 들여오는 수입품에 환장했다. 주달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크메르인들은 가는 이중사로 만든 비단을 대단히 귀하게 여긴다. 전저우의 백랍 도자기, 원저우의 칠기 접시와 천저우의 청자도 많이 찾는다. 콩과 밀은 특히 많이 찾지만 거기까지 수송하기가 어렵다.' 라고 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